공연전시 깊이보기(칼럼)

제목 [조훈성] 천막연극 철탑 앞에 돌탑을 세우다 "웃어요 할매"

평점 : 5점  

작성자 : 대전공연전시 (ip:)

작성일 : 16.07.06

조회 : 1485

추천 : 추천

내용

연극평론지 《봄》, 2014.

‘천막 연극, 철탑 앞에 돌탑을 세우다’

극단 일터의 <웃어요 할매> 평


조훈성(공연축제평론가)


·공연일시: 2014년 9월 17일~ 10월 12일

·공연장소: 부산 일터 소극장

·대본연출: 김기영

·출    연: 윤순심(청도댁)

진선미(앵곡댁)

임정남(명순씨)

조기정(정수)




1. 철탑 앞에 돌탑을 세우다


철탑과 돌탑의 싸움이다. 오늘 수많은 연대의 천막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쇠붙이라는 이물은 참 섬뜩하고도 모든 것을 앗아 갈 것 같은 두려움의 재료가 돼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모든 것을 쇠붙이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생명에 이반된 그것. 부산의 한 소극장의 연극은 그렇게 그 철탑과 마주서려 한다.



[극단 일터의 <웃어요 할매> 포스터]


극단 일터의 스물두 번째 창작공연 <웃어요 할매>가 부산에서 근 한 달여 동안 상연된다는 소식이 공주까지 전해져왔다. 나는 작품 포스터만 보고도, 또 장기 상연 소식만 듣고도, 애써 작품을 만든 이들의 속내를 어림잡아 볼 수 있었다.

예술은 사회가 주목하고 싶어 하지 않는, 불편한 바깥의 이야기를 공적 공간으로 소환해 의미를 두려는 작업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연극만큼 역사 속 인간들이 빚어내는 사회적 갈등을 재현하는 현장 예술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연극은 바로 이러한 소외되고 배제된 대상을 포용하려는 자세가 무엇보다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연극 세계에서의 ‘행동(Ex-formal)’이야말로 예술과 사회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며, 그 역할이야말로 그 연극의 가치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사회적 갈등을 찾아볼 수 없는 환상적 예술 무대라 할지라도 실상은 사회적 현실에서 결핍된 욕망의 상대적 대체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은 놀이요, 제의요, 축제라고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행위는 시공을 분절하여 ‘맺힘’에 대한 ‘풀이’로서의 ‘일탈의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웃어요 할매>에서 ‘웃어요’라는 청유적 표현은 ‘할매’들이 ‘웃을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 조그만 천막극장은 그만큼 ‘할매’들의 ‘원’이 잘 형상화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또, 그 대상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공적공간으로서 자연 상태 그것으로의 환원과 복구가 가능해질 수 있는 곳이기도 해야 한다. 그래서 연극 안의 ‘돌탑’은 중요한 기호가 된다. 극중 ‘청도댁’의 돌탑은 여느 기구(祈求)를 위한 ‘돌탑’과는 다른 거리감(상실-회복)을 가지고 있다. 극중 ‘할매’들은 하루아침에 자신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고압송전탑과 매일같이 맞서고 있다. ‘돌탑’은 할매들이 갖는 ‘관용’의 최후의 보루와도 같다. 이제 세계는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에서 더 이상 무장투쟁이니 정치적 투쟁이니 등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렇게나마 집결하여 대적할 수 있는 지점은 ‘돌탑’이라는 대상물을 놓고 힘겹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청도댁과 돌탑-<웃어요 할매> 중에서 *극단 일터 사진 제공]



한편, 이 작품은 위양리 127번 철탑 농성움막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연극에서는 세 할매(청도댁, 앵곡댁, 맹순씨)의 삶과 투쟁이 그려지는데, 이 ‘할매’들의 ‘농성’은 비일상적 행위로서 ‘천막’이라는 공간에서 일상화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극에서는 밀양송전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국가폭력의 문제가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극중 인물이든 관극인들이든 이미 그 폭력에 대한 공통적 인지경험을 전제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극장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할매’들과 함께 천막 연대 농성에 동참하게 된다는 설정이 가능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연극에서 그나마 구체적으로 문제의 ‘폭력’이 형상화되는 것은 작품 후반부에서야 긴박한 현장의 배경효과음과 함께 할매들의 필사적 저항이라는 재현 행위를 통해서야 나타날 뿐이다. 그러므로 개개의 농성에 대한 개연성 있는 서사는 과감히 생략되어 있다.

다시 말해 관객들은 ‘밀양’에서의 저항을 인지하고 농성에 가담하고 있으며 시차적 관점에서 그 교착 상태를 알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작품이 전개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 상황은 전복적이라기보다 국지적 행동에 대한 참여를 자연스럽게 추인하고 있다.

이 연극의 상황적 진실성은 드라마적인 한 개인의 연대기와 인과적 서사를 과감히 걷어내고도 충분하게 보여진다는 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사실 이 작품의 누수가 생기는 부분도 현장의 교착지점을 천막농성이라는 한정된 ‘상황 공간’을 통해 장치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이 연극은 ‘철탑’을 선명하게 형상화하기보다는 ‘돌탑(과거+미래)’과 ‘천막(오늘)’이라는 대상에 저항의 의지를 투사시키는 데 골몰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극중 인물의 내력에 대해서는 그 인과가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회귀, “부디, 한 말씀만 하소서”


‘회귀’란 주제는 어떤 문학 장르를 불문하고, 부조리한 세계 상황의 해결과 갈등 해소로서 이전 상태의 환원을 요구한다. 이렇듯 이 작품에서도 ‘자연성의 회복’은 바로 이 연극의 목표 지향 세계이며 과제라 할 수 있다. ‘자연성’은 ‘어제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어제’는 ‘공동체’에 대한 환상이 깃든 곳이고, 근대로 떠난 자들이 돌아올 이상적 무릉도원으로서 존재하는 향수 공간이기도 하다. 아마도 ‘새로운 삶의 창안’이라는 미래적 가치를 이 연극에서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내일’은 희망의 근거가 되지 못하고 맞서 싸워야 할 적들이 예비되어 있는 부정화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도토리, 시래기 말리기-<웃어요 할매> 중에서 *극단 일터 사진 제공]



나는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밖에 없다. 이 연극에서 ‘회귀’는 바로 ‘배제된 자’를 위해 ‘어제’의 의미를 진지하게 묻고 밝히고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연극은 의미가 있다. 그들의 어제야말로 오늘을 버틸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의미소가 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국가폭력에 피해자인 이들은 한순간에 모두를 위한 공리를 져버리고 ‘폭동’을 일으킨 불순한 범법자로 역전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이 연극의 시선은 사회구조적 폭력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 ‘폭력의 형상화’가 아닌 ‘폭력에 대한 저항’을 어떻게 해서라도 선명하게 작품에 형상화시키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극중 세 할매는 생태적 지속가능한 공동체 유지를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이들 세 할매로 분한 배우들의 작품을 위한 헌신은 메시지 진정성과 함께 ‘오늘’의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들의 흡인력 있는 연기는 이 연극이 집회연극으로서 장점을 두드러지게 한다. 작품에서 자칫 배우의 연기가 감정의 동일화에서 너무 과하거나 그 반대로 상황에 무지하고 몰이해했을 때, 그 연극집회에서 얻고자 한 소기의 성과가 반감되기 일쑤이다. 하지만 세 배우의 호흡은 모두가 농성 상황에 몰입할 수 있게 할 만큼 충분히 인상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덕분에 ‘천막’이라는 특정 공간이 극장에 들어와서도 생생하게 그 현장감이 전달된다.  


자연성을 기만 획책하는 ‘폭력’은 철저히 역사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연대’를 통한 ‘희망’의 끈을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이 작품은 분명 전하는 바가 크다. 거대한 높이의 765㎸ 초고압 송전탑 건설에 10년째 싸우는 밀양의 노인들은 그저 고향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그 꿈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얼마 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전한 그들의 편지에는 ‘회귀’의 꿈이 산산조각 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 편지의 마지막 문장. “부디,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그들의 간절한 목소리는 상대도 없이 내 감정을 뜨거워지게끔 한다. 극단 일터의 <웃어요 할매> 역시 연극이 끝났을 때 이와 동일한 심정을 갖게 한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무기력해진 개인들에게 ‘부질없는 희망’과 ‘고통의 강요’라는 ‘연대’의 부정적 입장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연대’는 이 연극이 바라는 바대로 ‘들음’과 ‘위로’가 전부인지도 모른다. 이 부서진 ‘회귀’의 꿈을 형상화하는 것은 그들 희생을 밑거름한 새로운 연대, 불의한 국가권력과 자본에 대한 각성을 통해 저항의 지점을 다지는 작업이 될 수 있기에 소중하다.  



[<웃어요 할매> 중에서 *극단 일터 사진 제공]




3. 절망 속 희망의 교리


정한수를 떠놓고 내일을 위한 기도를 하는 ‘할매’와 밀양 송전탑 반대를 부르짖는 할매들의 현장이 중첩되면서 이 연극의 불편함은 보는 이들에게 고스란히 감정이입 된다. 현장의 신음과 눈물이 극장 곳곳에서 똑같이 터져 나온다. 연극 안의 농성이 불편한 이유는 그 연극적 상황에서 이 편이든 저 편이든 낄 수 없는, 그저 연극을 ‘관망’할 수밖에 없는 관극 위치에 있는지도 모른다. 절망은 그런 ‘희망’의 씨앗으로 얻은 낙과(落果)일 뿐이다.


근래 극장 안에 너무 많은 천막들이 지어지고 있다. 그렇게 쉽사리 극장은 농성장으로 변한다. 철거할 수 없는 천막을 갖고 싶어서인지 그 약자들은 이제 극장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날 야기되는 많은 정의롭지 못한 문제들, 불평등과 착취, 불의의 현장이 어떻게 이 천막의 불빛만으로 해결되어질 수 있단 말인가. 연극을 통해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는 말을 차마 더 이상 입에 올리지 못하겠다. 연극에서 ‘정한수’야말로 그 불편한 ‘희망’이다. 이러한 ‘관용’의 태도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연극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자유주의적 보편을 내세운 실리적 사고 문제로 봐진다.


연극은 ‘회복’을 바랐으나 ‘해소’ 이상으로 진전되지 못한다. 희망의 교리로만은 무너진 건물을 세울 수 있는 벽돌을 마련할 수 없다. 하지만 극중 할매가 사업 실패로 목숨을 버리려는 ‘정수’의 등을 쓸어주는 것처럼,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무기력한 여럿에게는 분명 ‘들음’이야말로 ‘회복’의 단초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연출의 이야기에 ‘내게도 세 평짜리 밭이 생겼다’는 말은 이 연극의 돌탑 쌓기에 대한 충분한 명분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밀양의 이야기는 싸움에 지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권력의 폭력에 무력하게 ‘어떻게 해요’를 수없이 내뱉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이 안녕하지 못하므로 이 연극이 우리에게 더욱 돌봄이 될 만하다.  



 




 

조훈성(문학박사, 공연축제평론가)

문학박사(「마당극의 사회의식 변화에 관한 연구 : 대전ㆍ충청지역을 중심으로」 (공주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학위논문, 2013)

前, 사)한국민족극운동협회 <민족극과예술운동>편집장

現, 공주대학교, 한밭대학교 출강.

現, 공주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現, 민족극예술연구소 판 대표




 

 

첨부파일 :

비밀번호 :

삭제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댓글 수정

비밀번호

내용

/ byte

수정 취소

댓글 입력

이름 :

비밀번호 :

내용

/ byte

평점 :

*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
(대소문자구분)

회원에게만 댓글 작성 권한이 있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