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전시 깊이보기(칼럼)

제목 [조훈성] 개인기억의 허구와 공간의 불안성 : 대전연극제, [철수의 난]

평점 : 5점  

작성자 : 대전공연전시 (ip:)

작성일 : 17.07.10

조회 : 799

추천 : 추천

내용

 

개인기억의 허구와 공간의 불안성 : 대전연극제, [철수의 난]



∙2016년 3월 2일 수요일 오후 4:00 / 7:30

∙대전예술의전당 앙상블홀

∙극단 나무씨어터 협동조합(대표 조중석)

∙작가 윤미현 / 연출 조중석


조훈성(공연축제평론가)





2016년 '대전연극제'에서 '나무시어터연극협동조합'의 [철수의 난]이 대상을 받았다. 이어서 [철수의 난]은 올해 처음으로 열린 '대한민국연극제' // 주석 : '대한민국연극제'는 33년 전통의 '전국연극제'를 이어받아 새롭게 태어난 전국 연극경연대회로서 전국 16개 시·도 대표팀이 참가하는 연극제다. // 에서 대통령상과 연출상(김상열, 대전대학교 방송공연예술학과 교수)을 휩쓸었으니 이를 지역 연극계로서는 매우 자랑스러워할 부분이고 영예롭게 생각할 일이 분명하다.


남들처럼 나도 축하의 메시지를 몇몇 지인에게 보냈다. 그런데 평자로서는 이미 써놓은 자신의 원고지를 바라보면서 허탈한 심정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내가 그토록 극장을 드나들면서 어느 연극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렇게까지 어두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대전연극제'에 출품된 [철수의 난]은 심지어 두 단체(극단 마당, 나무시어터연극협동조합)가 각기 다른 무대 연출로 선보였던 작품이었고, 그렇다고 나는 그게 파란이 있을 만큼의 작품이라고는 바라보지 못했다. 물론, 올해 대전연극제에 출품된 작품이 많은 편수도 아니었거니와(앞서 두 극단의 [철수의 난], 극단 앙상블의 [김봉출은 누가 죽였나], 극단 금강의 [그들이 허락하지 않은 아이]), 적어도 내게는 개개 작품이 갖는 미덕은 있었으나 그 무대가 대단한 연극적 환상을 불러일으킬만한 장치가 돋보였다든지, 또는 어느 배우의 연기가 어떤 표현 일체를 통해 부조리 상황에 대한 오성적 인식(悟性的 認識)을 갖도록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진 않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 무대는 '추상적 성질'만 이것저것 엉기성기 붙여놓기 일쑤이고, 그러한 애매모호한'상상'의 폴립(polyp)은 '칸'을 나누고'층(層)'만을 올리고 있었을 뿐,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재미'는 전반적으로 부족했다.


그런 원고지 칸을 벗어난 삐침에도 불구하고, [철수의 난]이 '대한민국연극제'에서도 큰 성과를 이루었으니, 내가 [철수의 난]을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셈이다. 물론 이를 취향으로 돌릴 수도 있겠으나, 세팅된 무대 공간 창출이 그다지 신선하게 보이지도 않았고, 그 원래 희곡에서의 메시지 또한 잘 전달되었다고도 보지 않았기에 이 작품이 성취한 극적 환상에 대해 '어제'를 몇 번이고 다시 '기억'해보면서 그 다른 시선을 찾아보고자 한다. 꺼내본다고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기억'도 아닌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회상'을 통해 불완전하지만 좋은'무대'를 미처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자책을 대신하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 작품에 잘 몰입하지 못한 이유 역시도 돌아볼 것이다.




2. '기억의 허구'와 부조리(不條理)의 세계


작품 희곡으로서 윤미현 작가의 [철수의 난]은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삶을 그려냈다는 것에는 공감한다. 어느 희곡이든 비틀어지고 사이가 벌어진 세계의 균열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기에, 이 작품 역시 그러한 틈을 잘 찾아 드러내 보여줬다는 데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비합리'와 '부조리'한 세계를 견뎌내는 '인간'의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이다. 이를 '비극적'이냐, '해학적'이냐의 드라마의 구별-차별을 떠나서 과연 그 '희곡'([철수의 난]에 대한 해석의 무대가 '-난(亂)'이 갖고 있는 모든 '의미'를 궤도 삼을 수 있을만한지, 또 근대적 사이를 '건널 만큼' 대단한 것이었느냐에 대해 나는 부정적인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즉, 희곡의 '읽는 재미'는 읽혔을지 몰라도 연극은 재미없게도 쓰잘머리 없이 '구멍'과 '칸'에 집착하게끔 연출된다.  


극장은 누구 말마따나 역사의 영광 뿐 아니라, 상처와 패배의 기록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내게는 강박적일 수 있으나 이 '쇠락한 동네'의 부조리 상황에 대한 인식이 적어도 '오늘', 그 연극이 왜 무대에 올려져야 하는지, 어떠한 메시지로 시대를 '증좌'하고 함께 도모할 대상을 선명하게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 연극은'장면'이 가벼워지지 않기 위한 노력을 수없이 시도하고 있을 뿐이다. 무시무시한 '헬리콥터'로터 소리가 들리는 순간, 과거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는 시간을 가져올만한 '공간'이 필요했고, 그만큼의 난리법석도 마련됐어야 했기에, 이 연극은 기괴한 층과 칸, 그리고 구멍의 분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미 자신들의 손에 쥔 대본을 보자마자 그들의 무대가 결코 지상의 낭만적 공간을 만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면의 연출은 과거의 '기억'과 중첩되는 '오늘'의 고리를 잘 드러내는데 보다 더 치중했어야 했다. 그 연극의 잔상이 사라져가는 즈음해서 기억할 만한 장면의 흔적을 추적해봐야 그림자를 사유하는 부질없는 욕망에 가위눌려 있다. 그리고 '기억'의 허상에 불과한 잡동사니를 산만하게 배치하고, 자신의 벗은 몸을 문지르면서 감격해하고 있는 인물들을 볼 뿐이라는 점이다.


무엇을 잃었다는 '상실'에 대한 기억마저 없는 세계를 구조해놓고, 부조리한 상황에서 연극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저 괴기한 장면이 반복될 뿐이다. 원래 연극의 세계란 이런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것투성이니 이 작품이 과연 세계의 어떤 면을 비합리하고 부조리하게 보고 있는지, 이를 어떻게 해석하여 풀었는지 뜯어 볼 일이다.


무대 일 층에는 네 개의 허름한 공간으로 구획되어 있다. 무대 하수 쪽에서부터  구멍가게, 세탁소, 폐품이 쌓인 채소가게, 그릇가게가 이어져 있다. 그 가게들의 위층은 마을 입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억새풀이 듬성듬성한 비포장 개활지로, 아주 낡은 경차(마티즈)가 한 대가 버려진 채 주차되어 있다. 가게 앞 통로에는 가로로 움푹 파인 커다란 웅덩이(씽크홀)가 있는데, 극중에는 그 바닥에 물이 흐르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고, 극중에 마을 사람들이나 토끼(토끼 탈을 쓴)가 그 속에서 기어 나온다. 또 객석에서 바로 볼 수 있는 연주석이 마련되어서 다른 무대와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작품의 배경이라면 전쟁이 곧 발발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그 소문에 의해, 대다수는 생업을 포기하고 국외로 떠나간 상태다. 당연히 마을의 가게에 장사가 될 리 만무하다. 손님이 끊어진지 오래된 동네, 철수네 채소가게는 장사는커녕 산에서 도라지를 캐다가 껍질을 벗겨 그것으로 끼니를 때울 뿐이다. 또 구멍가게는 온통 잡다한 전자제품들이 쌓여있는 고물상이 되어버렸고, 그릇가게 역시 벽에 많은 식기를 매달아 놓았지만, 손님 없긴 마찬가지여서 주인은 빈 식기와 수저를 큰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웅덩이에 버리는 일을 반복한다. 그러한 흉흉한 소문이 도는 와중에도 동네에 남을 수밖에 없는 등장인물들은 동시대 군상의 표상으로 보인다. 이 마을을 '떠날 수 없는 존재'들은 부조리한 세계에 부조리한 행위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  


도입부터가 웅덩이에서 커다란 토끼가 등장을 하며, 할 일없이 배회하는 동네 장정들은 술이 떨어져 공업용 알코올에 곡식분말을 타서 마시고, 무시무시한 소문이 들려오는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하게 도라지 껍질을 계속 벗기는 노부부, 작달만한 체구의 철수는 허언증 환자처럼 헛소리를 하면서 소형 냉장고 속에 들고나가기를 반복할 뿐이다. 거기에 고모라는 여자는 성형수술을 했는지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으며, 나이 어린 철근은 리어카에 사람들이 버리고 간 고물을 가득 수집해온다.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인물에 대한 의심은 별 필요 없게 된 경찰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철수에서 비롯되는데, 결국 자신의 가족과 이웃까지 간첩으로 의심하는 강박증에 시달리다가 경찰에 신고하는 해프닝까지 치닫는다.


부조리한 상황이 이런 별스럽지도 않은 인물을 만들어낸 것인지, 아니면 이런 인물들이 부조리한 세계를 만들어냈는지 모르게 부재(不在)한 '무엇'을 밝히기 위해 서서히 극 전개의 속도는 빨라진다. 이런 무기력한 인물이 만들어내는 괴기스러운 장면의 반복은 그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철수'의 대사를 통해 쉽게 단락시킨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습니다."


철수의 이런 대사는 다분히 작가적 메시지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 또 이 연극의 연출에서도 이러한 메시지를 담기 위해 등장인물의 '떠돌기'와 '떠듦'에 집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다수 희곡에서 이러한 '떠도는 이'들의 '떠듦'은 예사롭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은유들로 가득할 때가 많다. 삶이 황폐해질수록 떠도는 이들을 늘어나고, 그들의 떠들기(말하기)는 희곡의 장소를 선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조리를 맞닥뜨리면서 충만했던 삶의 어제를 기억하려고 애쓴다.


이런 연극을 바라보는 시점에서는 외부에서 오는 필연적인 사건을 주목하게 되는데, 이는 등장인물들의 '존재'를 쉽게 박탈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한 외부 장력에 휘말린 인물,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이 그 세계를 인식하는 중요한 지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철수의 난]에서 결국 '기억'이란 삶의 토대가 무너진 상황에서 무엇이 그 각 인물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지를 확인해주고, 그 인물이 견디어가는 생활의 발자국을 찾는 노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에서의 인물들이 갖는 병적인 자폐성, 착란적 망상으로 벌어지는 '부정적 상황'은 블랙코미디를 만든다. 이 연극의 파탄적 세계는 극중 어느 인물이 온전한 이성으로 어느 기관 부서에 진정서, 탄원서 같은 민원를 넣는다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회수 불가능한 유실물처럼 극중 인물은 그곳에 남은 채, 그 무엇도 누군가 대신 처리해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떠도는 이', '무기력한 인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그로데스크, 공간의 불안성


희곡에 포박당한 극중 인물들만큼 연극 공연을 보는 관객도 연출된 수많은 연극적 허구(극적 장치)에 묶여 서서히 수렁에 빠져들고 만다.


어떤 희곡이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역사를 재현하겠다면야 그 연극은 관객의 눈에 쉽게 들어왔을 것이다. 이미 그 연극은 '역사읽기'라는 보편적이면서 장래의 후속적 '기억'에 대한 회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세계와 거리를 두면서 '허구'의 공간을 만들어낸, '어제'인지 '내일'인지 모를 '작은 방'에서의 횡설수설은 쉽사리 그 기억의 '길'에 순탄히 따라갈 수 없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런 연극읽기에 있어서의 해방, 정신의 가벼움을 만끽하고 싶어 한다. 그럴수록 관객은 점점 오늘의 논리와 어법에서 그 기억의 공간에 대한 공감을 전혀 하지 못한 채 소외되기 쉽다. 작은 방의 소란스러움이 무슨 대단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희곡 속에 있던 폐허가 더욱 쇠락한 공간으로서 나타나 보일 뿐이다. 파편적인 단편들, '그곳'에서는 모든 존재가 전체가 된다. 파편에 의한 내러티브는 결국 개개 단편의 구체적인 경험이 따로 모이면서도 또 분산될 수밖에 없으며, 유언비어로 날조된 소박한 삶 속에 극적 전환점을 만들고, 그로테스크한 인물을 형상화하게 된다. 그렇게 창조된 분열증을 앓는 인물들은 굳은 포즈를 취하면서 피날레를 장식할 뿐이다.


결국, 이 작품은 감성적 언표도 이끌어 내지 못하면서, 공간의 상상력으로만 억압적 이미지의 형상화와 그 분열 과정을 표현하는 데 그치고 있다. 막스베버는 '인간은 자신이 뿜어낸 의미의 그물 가운데 고정된 거미와 같은 존재(Max Weber, 'Web of meaning')'라고 말했다. 실상 그 그물에서 떠나지 못하는'거미'처럼, 이 연극의 인물도, 연극을 연출한 이도, 심지어 그 '거미'를 '바라보는 이' 역시 어떠한 '의미'에 갇힌 채, 이 연극적 상황을 자신에게만 독점될 수 있는 먹잇감으로 보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 경계선에서 안심한 채 억압이 고통스럽기보다 오히려 항구적 불안 속에 잠식되어 버린 세계 안에 머무는 데 그치는 것이다. 이 연극의 다발적이면서 충동적 에피소드들이 충분한 공감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무대의 '예술적 진실(artistic truth)'을 통해 '어느 사회의 형식'이 '그 문화의 전말(顚末)'의 이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길 바랐다. 그리고 그 연출된 무대가 희곡에서보다 진보된 소산으로서 그 세계를 바라보는 현실 대중의 리비도를 자극해 줄 수 있길 원했다. '어제'에 대한 인물들의 기억이 '오늘'에서 관성적으로 지속되고 있다면, 그로테스크(grotesque) // 주석 : 1957년 독일의 비평가 볼프강 카이저(Wolfgang Kayser)가 [예술과 문학에서의 그로테스크](The Grotesque in Art Literature)를 출간함으로써 그로테스크가 주목할 만한 미학적 분석과 비평적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한 장면을 통해 한쪽에서는 웃음이요, 다른 한쪽에서는 공포와 혐오감이라는 근본적으로 상충되는 반응의 충돌이, 지루하지 않고 속도감 있게 다루어지길 바랐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무대의 그로테스크는 공상적이라기보다 이에 대비되는 사실(realistic)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거짓 없이 새롭게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그로테스크가 채택될 것이다."라는 '체스터튼(G.K. Chesterton)'의 말을 인용한다면 이 그로테스크로서 투영된 세계는 낯설어진 또는 소외된 세계의 표현이 아니라 그 세계와의 관계를 보여주었어야 했다. 한편으로는 그 시선에서 '친숙해진 세계'는 다시 갑작스럽게 낯설게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이 연극을 관극하는 데 있어서의 이런 불편함과 부조화에 대한 감각은, 끔찍한 세계에 대한 희극적 장면, 인물의 떠듦과 행동에서의 지나침(과장)을 통한 비정상성, 세태 풍자적인 장난이 뒤얽히면서, 긴장된 세계를 끊임없이 이완시키는 노력이 지루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이 총체적 불안에 대한 근본적 체험의 거리가 멀게 느껴지게 한 것이다.


나는 [철수의 난]을 통해 어느 '이데올로기'가 이 시대에 어떻게 남아 토착적으로 생활양식화 했는지, 또 그것이 어떠한 시대정신 속에 추상적 구호로 발명되고 보급되고 있는지를 포착하면서, 인물의 내면화한 두려움을 통해 외부 세계의 공허와 개인의 피탈 관계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조훈성(문학박사, 공연축제평론가)

문학박사(「마당극의 사회의식 변화에 관한 연구 : 대전ㆍ충청지역을 중심으로」 (공주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학위논문, 2013)

前, 사)한국민족극운동협회 <민족극과예술운동>편집장

現, 공주대학교, 한밭대학교 출강.

現, 공주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現, 민족극예술연구소 판 대표 


※ 이 글은 저작권자인 (사)대전민예총의 허락을 받아 동 기관이 2016년 발간한 "대전연극 비평과 리뷰 : 무대와의 불화"에서 평글 전문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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